
[강대호 칼럼니스트]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도시화가 시작된 건 1968년경 토지구획정리가 진행되면서부터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시흥역(금천구청역) 주변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공업화가 일부 이뤄지긴 했으나 주거 공간의 확대와 연계되는 본격적인 도시화는 토지구획정리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먹튀 사이트 검색동 일대를 돌아보면 연립주택 등 저층의 공동주택이 빽빽이 늘어선 골목들이 교차하고 있고, 산자락이나 먹튀 사이트 검색대로 주변으로는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서 있다. 간혹 소규모 단지도 보이고 오래전에 지은 단지가 재건축되는 현장도 있긴 하지만.
서울과 가까운 별장지
토지구획정리가 진행되기 전 먹튀 사이트 검색동 일대는 일부 주거지와 공업지대 외에는 논밭이 많았다. 그리고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자락의 녹지대가 많았다. 게다가 서울과 가깝기도 해 예로부터 권세가들의 별장이 많은 고장이기도 했다.
먹튀 사이트 검색4동의 신흥초등학교 앞 도로는 산을 끼고 있다. 도로 옆으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이 있는데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이 그곳이다. 여기에 묻힌 ‘안경공(安景恭)’은 조선의 개국 공신이고, 문인 화가로 유명한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손자사위다.
관련 자료를 참고하면, 묘역이 있는 먹튀 사이트 검색4동 일대에는 순흥안씨의 선영과 별서(別墅)가 있었다. 조선시대 권세가들은 한양에 서울의 집인 경저(京邸)를, 고향에는 향제(鄕第)를 두었다. 그리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 일원에 별서, 즉 별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 묘역과 가까운 골목에 ‘강희맹 살던 곳’이라고 쓰인 표석이 있다. 강희맹의 장인은 딸에게, 즉 강희맹의 부인에게 이 일대의 작은 땅을 물려주었다고 전한다.
강희맹은 이곳의 작은 집에 머물며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농민들에게 가르침 받은 내용과 자신의 체험, 견문을 토대로 저술한 농서가 ‘금양잡록(衿陽雜錄)’이다.
오늘날 묘역 아래 동네에는 연립주택이 늘어선 골목들이 줄지어 교차한다. 대개 1980년대 이후에 지어진 공동주택들이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 일대에서 진행된 토지구획정리의 결과라고 보면 된다.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 앞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삼성산터널’과 ‘삼성산2터널’이 나온다. 이 터널들을 지나면 산자락 아래로 가림막이 쳐진 공사장이 보인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 현대아파트’를 재건축하는 현장인데 그 터는 예전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자리였다.
이와 관련한 전설이 있다. 이곳에는 강원도의 부자가 소유한 아흔아홉 간 기와집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빼앗았다고 한다. 전설이라 표현한 건 정확한 유래가 학술적으로 합의된 건 없기 때문이다. 확인된 사실은 일제강점기까지 이 일대가 흥선대원군의 아들 소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터에는 규모가 큰 한옥도 존재했었다.

나름의 역사적 가치를 지녔던 한옥과 부지는 1977년 현대산업개발(HDC)이 매입해 1985년에 사원 아파트로 건축했다. 결국 한옥은 헐렸다. 다만 과거의 흔적으로 ‘흥선대원군 별장 터’라는 표석을 단지 입구에 세웠다.
그 후 40년이 흘러 낡은 아파트는 헐리고 옛 단지 주변으로는 재건축임을 알리는 가림막이 쳐졌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별장 터’ 표석은 보이지 않았다. 표석이 있던 옛 입구 주변은 연립주택이 늘어선 좁은 골목이다. 주민들에게 수소문하니 위치상 가림막 안쪽에 있을 텐데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아는 공사 관계자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표석으로 남았던 옛 흔적은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나 포털 지도 ‘거리뷰’ 항목의 과거 자료에서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먹튀 사이트 검색5동 주민센터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이면도로는 ‘별장거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과거 이 주변에 장택상의 별장이 있었던 영향이다. 장택상은 대한민국 초대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5·16 군사쿠데타 후 다른 이에게 소유가 넘어간 이 땅은 1978년에 삼천리 건설 소유가 되었다.

삼천리 건설은 1986년 이 일대에 ‘삼천리 별장 빌라’를 건축했다. 당시 신문을 검색하면 별장빌라 분양 광고를 꽤 확인할 수 있다. 인근에 시흥 계곡이 있고 권력자의 별장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 광고였다.
2005년 별장빌라는 아파트로 재건축됐다. 이름도 건설사 이름을 앞세웠다. 아파트 주변으로는 연립주택 등 공동주택이 들어섰다. 그래도 이 일대를 주민들은 ‘별장’이 있던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 별장거리의 시계탑 주변이다. ‘별장약국’처럼 간판에 별장을 상호로 내세운 가게가 여러 곳이다.

아파트 단지로 변한 수재민 정착촌
토지구획정리가 완료된 1980년대에 먹튀 사이트 검색동에는 집장사들이 지은 연립주택들이 대거 들어섰다. 동시에 인구도 함께 늘어났다. 그런데 그전에도 먹튀 사이트 검색동 일대에 인구가 대거 유입되던 시기가 있었다.
1966년 서울시 일원에 집중호우가 강타해 수재민이 많이 발생했다. 서울시는 시 외곽에 이들 수재민을 이주시켰는데 먹튀 사이트 검색동 또한 수재민들의 이주지 중 한 곳이었다.
당시 자료를 참고하면, 먹튀 사이트 검색동 산91번지 일대에 수재민 3,400여 가구의 1만 3,800여 명을 이주시켰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 은행나무 앞 도로 따라 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고지대에 수재민 정착촌이 있었다.

정착 초기에는 4가구마다 대형 천막 하나를 배정하고 화장실은 40가구당 하나를 배정해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을 검색하면 정착촌에서 동사자가 발생했다는 기사들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후 정착촌에는 블록 벽돌집도 생겨났지만, 점차 판자촌으로 변했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 산자락은 결국 무허가 주택이 들어선 주거 공간이 되었는데 수재민뿐 아니라 서울 시내 철거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렇게 인구가 늘어나며 학령기 아동도 함께 늘어났다. 먹튀 사이트 검색2동의 탑동초등학교가 이 시기 개교했다.
하지만 판자촌은 자연재해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물과 불에 약한 건 물론 흙에도 약하다. 판자촌이 된 수재민 정착촌에 산사태라는 재앙이 닥쳤다. 그것도 1977년과 1987년 두 번이나.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첫 번째 산사태 이후 관계 당국은 대책을 세웠지만 실행은 없었다. 그렇게 10년을 방치하다가 다시 큰 산사태가 발생한 후에야 부랴부랴 집행에 나섰다. 불량 주택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에서 삼성산 방향 쪽으로 보이는, 산자락을 둘러싸고 있는 벽산 아파트 단지들이 바로 그곳이다.
이들 단지를 걸어서 가려면 숨이 차오르고 무릎은 비명을 지른다. 경사가 심하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버스는 아파트 단지 아래 평지가 종점이라 거기까지만 다닌다. 대신 마을버스가 이들 단지를 순회한다. 먹튀 사이트 검색동의 다른 고지대도 마찬가지로 마을버스가 중요한 이동 수단이다.
버스 종점의 위치를 과거 항공사진으로 확인하니 1972년에도 산 아래 공터에 버스 여러 대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쭉 버스 종점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60년대 말이라고도 기억했다.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선 우리네 아버지들이나 어머니들이 판자촌의 경사진 길을 내려와 새벽 버스를 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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